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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사

베토벤의 교향곡

by 아타카_attacca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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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독일의 도시 본에서 출행하여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선거 제후인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의 후원하에 있는 궁정 가수였다. 어린 베토벤은 초등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선거 제후의 궁정에서 오르간 부주자로서 일하면서 연주와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본이라는 도시가 자신의 야심을 충족시키기엔 너무 보잘것없다고 느낀 베토벤은 1792년에 여러 대가들과 공부하기 위하여 본을 떠나 비엔나로 갔다. 그때 이미 모차르트는 죽고 없었으나 하이든은 아직 건재하였다. 베토벤의 초기 후원자였던 발트슈타인 백작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너는 비엔나에 가서 그동안 네가 바라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너는 하이든의 손으로부터 모차르트의 정신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혁명 시기의 음악가

 베토벤은 평민 계층 출신의 작곡가로서 귀족들과 섞여 자기 방식대로 교류한 최초의 작곡가중 하나였다. 그는 천부적 재능이야말로 바로 자신을 고귀한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리히노브스키, 로브코비츠 왕자들을 비롯하여 루돌프 추기경과 라주모브스키 백장 등의 부유한 귀족들에게서 재정적 후원을 받았으나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후원자들이 베토벤과 같은 천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사회적 예술적 수준에 대하여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행동하였으며 예술가의 본질이 바로 독창성에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작곡가였다.

 관례적으로 베토벤의 음악 양식은 세 시기로 나뉜다. (1) 1782-1792년 사이에 본에서 작곡된 젊은 시절의 작품과 고전주의 양식을 잘 터득하여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소나타 구조의 범위에서 실험을 시작하던 시기의 1792-1802년 사이에 비엔나에서 작곡된 초기 작품들, (2) 1803년에서 1815년 동안 비엔나에서 작곡된 곡들이 중기에 속하며 이 시기에는 관현악곡들과 영우적 성격의 곡들이 지배적이었다. (3) 대략 1815년에서 1827년 사이에 작곡된 후기 작품들로서 이들은 형식 구조의 윤곽이 흐려졌으며 대위적 양식이 두드러지며 주제와 동기가 푸가적이거나 변주 기법을 통하여 최대한으로 발전되었다.  베토벤은 일생동안 모든 장르의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 교향곡들은 그 분야에서 표준적인 레퍼토리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베토벤의 교향곡은 그가 얼마나 고전주의 양식과 형식에 통달하였는가를 증명해 주는 곡들로서 베토벤의 개성적 양식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곡들이다. 또한 화성, 조성, 주제적 소재 및 형식에 있어 그는 혁신적인 기법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교향곡은 그의 후기 작품의 내성적인 성격을 말해준다. 베토벤의 양식적 발달 핵심에는 한 악장의 구조를 소나타를 외적인 형식으로 보기보다는 내용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다. 그의 관현악 기법은 개별 악기의 개량과 연주기법의 증진을 추구하는 그의 안목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1805년 비엔나에서 초연됨)와 <영웅 교향곡>은 이후 그가 작곡했던 곡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형적인 "영웅적"성격의 곡들이다. 

제5번 교향곡은 최초로 트롬본을 기용한 교향곡으로 꼽히는 곳으로 긴 발전부와 발전부 성격의 코다를 구비한 대규모의 순환구조적 균형미를 보여주는 곡이다. <전원 교향곡>은 수많은 표제 교향곡의 작곡에 발판을 제공해 준 곡이다. 제9번 교향곡은 최종악장에서는 독창과 합창의 성악적 요소들이 첨가되어 음색적 대비와 음향의 증가를 꾀하였다. 

제1번과 2번 교향곡은 비엔나 초기에 속하는 곡들로서 고전주의 정신을 완벽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3번에서 8번까지의 중기 교향곡들 중 제3번, 5번, 6번은 그 기초적인 성향이나 구조면에서 고전주의적이지만 전례 없는 생동감과 강렬함을 내포한다. 그들은 고전주의 양식에서 낭만주의 양식으로 가는 점진적인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들 중 처음 여섯 곡은 1799년과 1806-1807년의 대략 8년 사이에 작곡되었다. 제7번과 8번은 4년 후에 완성되었으나 제9번은 1817년 이후 7년 동안 다른 작품을 작곡하는 동안 꾸준히 쓰여 1824년에야 완성되었다. 

 

교향곡 제3번 (영웅 Eroica)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되었던 곡으로 위대한 영웅의 이상을 나타내는 불멸의 음악으로 우뚝 서있다. 이곡은 거대한 규모와 다양한 음악적 내용을 고려할 때 교향곡 역사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 작품이었다. 1악장만 691마디의 전대미문의 길이와 복잡성을 가진 작품인 것은 물론이고 주제의 선책과 발전 기법 등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곡이다. 이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프랑스혁명적 음악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거대한 기념비적인 규모의 제1악장 다음에는 느린 장송행진곡이 뒤따른다. 제3악장은 가볍고 질주하는 듯한 성격의 스케르조로서 전통적인 미뉴엣 악장을 대치하였다. 최종악장은 환희에 넘치는 악장으로 마치 승리한 영웅과 같은 분위기를 나타낸다. 이 네 악장들은 일련의 지속적인 정감을 나타낸다. 그들은 어떤 인간의 생애를 곧이곧대로 추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위대하고 영웅적인 본성을 가진 인물에 대한 베토벤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 당시 베토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폴레옹은 자유, 평등, 형제애를 가져다준 프랑스혁명의 희망이었다. 1803년 그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그는 이 곡을 <보나파르트>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로 즉위시켰다는 소식을 접한 베토벤은 격분하여 악보의 겉장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가 영웅으로 보았던 사람은 또 하나의 독재자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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