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주곡 협주곡이라는 의미의 <콘체르토>(concerto)란 용어는 바로크 초기에 콘체르타토 양식을 사용하는 종교적인 성악곡에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1675년 경에는 작곡가들이 기악 앙상블을 위한 콘체르토를 쓰기 시작하였고, 18세기 전반에는 그 성숙한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바로크를 상징하는 많은 특징들이 협주곡에 융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하나가 큰 그룹과 작은 그룹 사이의 대비라는 아이디어이다. 또한 협주곡은 바로크의 각 악기 특유의 관용 어법 추구가 완전히 가시화된 장르이기도 하다. 계속 저음이 기둥이 되는 화정석 짜임새와 장단조 체계와 전조 관습의 확립도 협주곡의 발전에 중요하였고 소나타에서 보였던 것처럼 한 작품이 여러 짧은 악장들의 결합으로서 새로운 통일성과 힘을 성취하는 조직도 협주곡에 필연적인 요소였다.
합주 협주곡 <큰 콘체르토>(concerto grosso)라는 뜻을 가진 초기의 진정한 협주곡은 주로 코렐리에 의해 발전되었다. 1682년 경에 작곡되어 1714년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코렐리는 콘체르티노라는 작은 그룹을 리피에노라고 불리는 큰 그룹과 대비시켰다. 콘체르티노는 삼중주 짜임새 즉 2개의 바이올린 같은 선율 악기와 계속 저음 악기들로 구성되고 큰 그룹은 계속 저음 악기들에다 현악기 때로는 관악기 다수를 포함했다. 큰 그룹과 작은 그룹 모두가 연주할 때는 튜티(tutti 합주)라고 하였다.
독주 협주곡 코렐리 이후 협주곡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킨 작곡가는 토렐리이다. 그의 초기 협주곡들은 다악장 관현악곡으로 독주 악구들을 갖기도 하였다. 그는 이 방향으로 개혁을 추구하여 독주 협주곡(solo concerto)을 만들었다. 이 협주곡에서 토렐리는 리피에노와 대비시킨 것은 독주 악기이다. 그의 독주 협주곡에서 토렐리는 리피에노를 좀 더 대위적으로 처리하여 독주 악기의 음악과 구별시켰다. 토렐리는 또한 리토르넬로 형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리피에노 악구가 약간의 변형만을 취하면서 그래도 돌아오는 대신 독주 악기는 도입 주제를 변화시키고 장식하여 대비되는 구조이다. 장 단조 화성이 리토르넬로의 기초적인 특성을 제공한다. 도입 주제는 리피에노에 의해 한 조로 처음 제시된다. 두 번째 리토르넬로부터는 다양한 조가 사용되고 마지막 리토르넬로는 처음의 조로 돌아온다. 토렐리는 3악장의 협주곡 형태를 쓰기 시작하였고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의 3악장 중 첫 알레그로가 가장 길로 아다지오가 가장 짧았다. 토렐리는 후에 협주곡의 표준이 될 요소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꾸준히 몰아가는 리듬과 조적 확립을 위한 3화음 형태의 강조이다. 토렐리는 리토르넬로의 도입부에서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토렐리 이후의 협주곡의 대가는 비발디이다. 바흐와 헨델도 독주와 합주 협주곡 장르 모두에 훌륭한 곡들을 남겼다.
토카타 <토카타>(toccata)는 일종의 전주곡으로 16세기 초 류트 음악으로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크 시대의 토카타는 주로 건반 악기 특히 오르간을 위한 장르로 정착된다. 토카타가 연주가의 기술을 드러내는데 적합하지만 특히 즉흥성을 살려야 하는 악곡이다. 쉽게 드러나는 토카타의 특성은 불규칙한 리듬, 트릴이나 턴 같은 장식들 등이다. 이탈리아의 프레스코발디가 토카타의 대표적 초기 작곡가이지만 오르간 토카타는 오르간 제작에 앞장선 독일에서 가장 발전되었다. 북스데후데 나 바흐의 토카타는 화려한 양식으로 완벽한 예들이다. 그들의 토카타는 종종 푸가와 짝지어진다.
18세기 전반의 대가들 바로크의 작곡가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상의 과거에 대해서나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현재 속에서 살고 있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18세기의 중요한 특징은 그 사회의 음악 환경이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고전적인 음악>은 없었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칸타타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야만 했고 헨델은 런던의 청중들을 위하여 매년 한곡 이상의 새로운 오페라를 작고해야만 했다. 그리고 비발디도 베네치아에서 축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오라토리오와 콘체르토를 써야만 했다. 이러한 부단히 계속되는 압력은 18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엄청난 작품 수를 만기고 놀라운 속도로 작곡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또한 그때그때의 상황이 요구하는데 따라서 작곡하였다. 18세기 대부분의 음악은 주문에 따라 구체적인 목적에 맞추어 쓰였다. 그 요구들은 주로 막대한 재산을 지니고 있는 관료적인 궁정이나 교회, 오페라 극장, 시의회에서 나왔다. 이러한 일종의 예술 후원 체계는 18세기 음악의 원천이었고 음악가들은 그러한 엄격한 체계 안에서 고용된 사람이었다. 후원자나 고용주가 작곡가의 작품량이나 종류를 조절하였다. 작곡가는 이 후원 체계 안에서 자신의 직위에 따라 활동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 걸이다. 바흐는 자기 자신을 "상사를 만족시키고 동료들을 즐겁게 하고 교화시키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라는 직업인"이라고 생각했다. 헨델의 관현악 모음곡 불꽃놀이도 고용주의 허가 없이 무단히 외유하고 나서 용서를 비는 뜻에서의 작품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라모의 행운도 프랑스의 대부호 라 푸플리니에르의 후원에 의해서야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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