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의 대화법

검은 황금 커피의 역사

아타카_attacca 2022. 5. 2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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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를 매우 사랑한다. 따지고 보면 어떤 날은 물보다 많이 마신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집에서 원두를 직접 사서 로스팅해 즐겨 먹는다. 직접 볶는 재미는 남편이 누리고 특별하고 신선한 커피는 내가 누리는 셈이다. 요즘 이렇게 가정에서 직접 로스팅해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브랜드 커피보다 개인 취향에 맞는 스페셜 브랜딩 원두도 인기를 누리고 있어서인지 원두값이 체감이 될 만큼 많이 올랐다. 심지어 원두 회사에서 무인 셀프 로스팅 카페까지 운영하기도 하며 적어도 한국 내의 커피산업은 이미 레드오션인 것 같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전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사회 활동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동안 커피가 가져온 세계 변화는 어떤 것이 었을까? 다시 한번 커피가 경제와 문화에 걸친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는 건 아닌지 한번 그 역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커피나무와 열매

커피를 위한 찬가

커피는 늘 역사에 변화를 일으켰다. 만약 커피가 없었다면 카페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카페가 없었다면 보스턴 차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해리포터 이야기는 물론, 카페라테만 마셔 대는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상은 또 어떻게 됐을까?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곡 중에는 "커피는 어찌 이리도 맛이 좋을까! 수천번의 입맞춤보다 사랑스럽고 마스 카텔 포도주보다도 달콤하네."라는 가사가 담긴 아리아가 있다. <커피 칸타타>는 이 매혹적인 음료가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예술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결실 중 하나에 불과했다. 1650년에 문예가를 꿈꾸던 학생들은 옥스퍼드에 자리한 영국의 초창기 커피점에 모여들었다. 이후 10년간 영국의 일기 작가 새뮤얼 피프스는 시인 존 드라이든과 같은 친구들을 데리고 런던의 몇몇 커피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20세기 초에 장 폴 사르트르는 파리의 카페 라 쿠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창작 활동을 했고, 동시대의 중반에는 비트 세대를 대변하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카페 메디테라네 움, 이름바 카페 메드(카페라테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하다.)에서 <울부짖음>이라는 시를 열심히 짓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복지 기금에 의지해 홀로 자식을 키우던 조앤 K. 롤링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디 엘리펀트 하우스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원고를 열심히 집필하고 있었다.

검은 황금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국가로, 이 나라에서 커피는 곧 검은 황금이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교의 정착지이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나라 이기도하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지금의 커피를 안겨준 이들은 바로 에티오피아의 수도사들이다. 이 이야기는 칼디라는 목동이 읽어버린 염소 떼를 찾다가 염소들이 "빨간 체리"를 열심히 먹는 모습을 발견한 데서 시작된다. 그 짐승들이 먹던 것은 1753년 린네가 코페아 아라비카라고 이름 붙인 식물의 열매였다. 새빨간 체리 속에 가득 찬 카페인으로 기분이 좋아진 그는 그 열매를 챙겨 수도원의 친구들에게 건넸다. 그렇게 커피나무를 재배하게 된 수도사들은 커피를 끓여 마시며 기도하는 중에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르코폴로가 쏘아 올린 커피나무

커피는 마르코폴로에 의해 그의 고향인 베네치아에 유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615년에 베네치아 인들은 스페인의 아메리카산 초콜릿과 중국산 차의 경쟁자가 될 새로운 카페인 음료를 '구세계'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커피나무를 처음 고국으로 가지고 돌아간 사람은 네덜란드인이었는데 이를 통해 그들이 매일 커피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지혜로운 네덜란드 원예가들은 1616년에 신형 온실에서 커피나무를 재배하고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그들은 17세기 중에 인도의 말라바르와 자바의 바타비아로 묘목을 옮겼다. 이후 자바섬은 전 세계에 커피를 공부하는 주요 수출지가 되었고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커피 무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프랑스가 이 작물을 손에 넣게 된 것은 1720년에 해군 장교 가브리엘 마티와 드클리와가 한 그루의 커피나무를 싣고 마르티니크 섬을 향하던 시기부터이다. 이 나무는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아 가시 울타리 안에 조심스럽게 옮겨졌고 그 결과 마르티니크 커피 산업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커피나무는 야생적으로 번식해 서인도 제도,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스리랑카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런던로이즈는 런던에 있는 런던 국제보험업자협회이다.

카페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다.

카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더욱 빠르게 전파되었다. 다방면에서 활약한 역사가 토마스 매콜리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 최초의 카페는 한 터키 상인이 세운 것으로, 그는 회교도 사이에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커피 맛이 무엇인지 배우고 익혀온 인물이다." 1683년에는 베네치아에 카페가 문을 열었고, 뒤이어 1720년에는 산마르코 광장 38에 그 이름도 유명한 카페 플로리안(당시 유일하게 여성이 드나들 수 있는 카페였다.)이 생겼는데 카사노바가 드나들었던 이곳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전통이 담긴 카페 코레도(에스프레소에 브랜디, 위스키, 코냑 같은 술을 섞어 만든 커피)를 제공한다. 카페는 예술적 창조의 공간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업무를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1688년 롬바르트 가에 자리한 에드워드 로이드의 카페는 선주들이 애용하는 단골집이 되면서 선박 보험회사인 런던 로이즈의 시발점이 되었다. 런던 증권거래소는 조너선 마일스의 카페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곳 역시 롬바르드가에 자리 잡은 카페였다. 1773년에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은 시내의 그린 드래건 카페에서 계획되었고, 미국의 독립 선언은 필라델피아의 머천트 커피 하우스에서 최소로 공표되었다. '영국 차'에 대한 반감으로 비롯된 애국심은 곧 커피를 마시는 행위로 발전했다. 그때부터 커피 소비량은 거침없이 증가했고 제3세계의 경제는 변덕스러운 커피 무역에 종속되고 말았다.

빌 로스, <식물, 역사를 뒤집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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