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의 대화법

차나무, 차(Tea)의 무역경쟁

아타카_attacca 2022. 5. 25. 01:25
반응형

며칠 전 커피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다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해 언급되어 조금 더 알아보았다.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12월 16일 미국 식민지 원주민들이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일으켰던 사건이다. 원인의 발단은 영국의 국왕 조지 3세가 식민지 관리들에게 수익을 안겨주기 위해 차 조례를 승인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수출하는 차에 25%의 세금을 부과했고 이 법으로 연이은 민중 폭동이 일어났으며, 향후 미국의 독립 전쟁을 향한 길을 터 주었다. 인류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기 위해 시작된 차문화일 텐데, 차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또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식물 공부한다고 시작하였지만 찾아볼수록 식물은 식재료뿐만 아니라 의학, 종교, 무역으로 시작된 전쟁과 산업 발달, 그리고 인류가 그만큼 성장하면서 필요한 자원들의 과학적 발달까지 어느 분야에서도 빠지지 않을 만큼 넓은 발전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 밭

위대한 진정제, Tea (차)

차는 인도와 중극 등지에서 생육되는 키 작은 야생 나뭇잎으로 만들어지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 역사가 무려 약 4,500년을 넘는다. 기원전 2737년 신농(고대 중국 신화시대의 황제, 농업과 의약의 신)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며, 학명에 포함된 카멜리아라는 이름은 17세기 예수회 식물학자 카멜리우스에게 경외를 표하고자 분인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처음 발견했던 바와 같이 생김새가 수수한 차나무의 푸른 잎을 말려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차나무는 묘한 만족함을 선사하며 우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음료로 다시 태어난다. 차나무를 재배할 때는 어린잎이 많이 돋아나도록 정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행하며 수확이 용이하도록 나무를 작은 관목 형태로 만든다. 인부들은 수확용 대바구니를 배낭처럼 등에 걸치고 가지 끝에서 고급 차에 사용될 새순과 두장의 잎사귀를 딴다. 이 세심한 방식 때문에 찻잎 수확 공정은 인부들의 임금만큼이나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수확하는 데 세심한 노력이 많이 들고 임금이 매우 박봉이라는 문제만 없었다면 차나무는 아마 더 많은 선진국에서 재배되었을 것이다. 차를 향한 전 세계적 관심은 녹차, 백차, 홍차, 황차, 재스민차, 국화차와 같이 다양한 종류의 차 음료를 낳았다.

중국의 차

18,19세기에 유럽인은 값싼 맥주와 우물물보다 차를 많이 마셨다. 마시는 양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더 자주 차를 찾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차 속에 함유된 미량의 카페인 때문이었다. 인도의 주요 무역항 마드라스와 봄베이, 캘커타를 확보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남인도에 자리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승리를 거둔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1757년 인도의 지배자들에게서 자원이 풍부한 인도 북동부 지역의 지배권을 빼앗은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프랑스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19세기까지 인도 내 최고의 무역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목재, 비단, 도자기와 함께 중국산 차를 고국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한 중국은 머나먼 서양 국가와 각종 삼품이나 기술, 지식을 거래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차 생산국이자 공급자의 위치에 있었다. 녹차 소비가 왕성한 국내 시장 덕분에 중국은 차 수출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서양의 차 무역상들이 대가로 제시한 돈다발에 무관심을 표했다. 대신 중국은 구리, 은, 금과 같은 값비싼 귀금속을 원했고, 그래서 현금으로 값을 치르길 바랐던 무역상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단단한 귀금속과 찻잎을 교환해야 한 했다.

보스턴 차 사건

18세기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당시의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차를 즐겼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주로 커피를 마시며 이들보다는 오히려 옆 나라의 캐나다인들이 약 4배 정도 더 많이 차를 소모한다. 애국심 강한 미국인이 그들의 이웃보다 차를 덜 마시게 된 것은 대략 200년이 넘었는데 이 습관적 행위의 역사적 뿌리는 보스턴의 찰스 강과 인근 바다가 둥둥 떠다니는 찻잎으로 순식간에 검게 변해 버린 1773년 12월의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일어난 사건의 외양으로는 부두에 정박한 무역선에 기어 올라간 모호크 족 인디언들이 차 화물을 일사불란하게 찢어 열고 강물로 던져 버린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차를 강탈한 무리는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언 복장을 한 급진파의 백인들이었다. 이들은 지배자를 자칭한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수출하는 상품, 특히 차에 과중한 관세를 부과하자 이 정책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렸다. 당시 차의 밀무역이 횡행해 큰 손해를 본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이 수입하는 차의 관세를 대폭 낮추는 대신 아메리카 대륙의 이주민들에게 그 비용을 물게 해 세입을 올리려 했다. 대륙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함성이 높아졌다. 이후 뉴욕과 필라델피아 및 찰스턴 등지에서 보스턴 차 사건과 유사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아메리카 대륙의 여인들이 오후의 다과회에서 차를 배제하자 마침내 영국 정부는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1776년 7월 4일 미국 의회가 독립 선언서를 채택한 순간 이 문서가 영국으로부터 아메리카의 분리를 공표함과 동시에 조지 왕의 '압제 행위'를 세상에 다시 알렸기 때문에 영국 왕이 저지른 실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토록 남게 되었다.

1870년 미국 화가 새뮤엘 콜먼이 그린 첫 아메리카 컵 대회 ( 사진 출처 Flickr )

운송 시간 단축을 위한 선박 기술의 발전

1833년에 동인도 회사의 독점 체제가 무너지며 차 거래의 국제 경쟁 시대가 열리자 새로운 선박 제조에 몰두한 영국과 미국은 공기 저항을 덜 받는 형태의 선체에 파도를 가르는 날렵한 선수를 갖추고 경사진 돛배에 많은 돛을 장착한 선박, 이른바 쾌속 범선을 완성했다. 차를 운반하던 쾌속 범선의 선장들은 고국을 향해 경주를 벌였고 언론에서는 이들이 악천후 속에서 벌인 영웅적인 대결을 기사화했다. 하지만 이 경쟁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적을 울리며 바라를 가로지르는 증기선이 나타나면서 쾌속 범선은 서서히 할 일을 잃어 갔다. 초창기에 증기선은 정기적으로 연료를 보충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발달이 더뎠다. 그러나 1869년 토목 분야에 새로운 위엄이 달성되면서 이 선박은 풍력으로 운직이는 쾌속 범선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올라섰다. 수에즈 운하는 중국과 유럽 간의 이동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 주었는데 이것은 오직 증기선에만 해당되었다. 쾌속 범선은 홍해의 변덕스러운 바람을 견디기 어려웠기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희망봉을 통과하며 3 개월 간의 긴 여행을 이어가야만 했다. 결국 쾌속 범선의 시대는 19세기 말에 끝나고 말았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