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의 대화법

카카오, 사랑의 나무

아타카_attacca 2022. 5. 2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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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탈리아의 자모코 카사노바는 여인들을 유혹할 때 초콜릿을 이용했다고 한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상사병에 걸린 사람의 뇌에서는 페닐에틸아민의 분비량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런데 카카오에 함유된 알칼로이드 살솔리놀과 페닐에틸아민이 함께 뇌에 작용해 항우울성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면 상사병에 걸렸을 때 초콜릿이 당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우리가 흔히 기분이 우울해지거나 몸이 쳐지면 단것이 당기는데 같은 이유일까? 오케스트라 연습을 가거나 쉬는 시간에는 꼭 초콜릿을 하나 사서 들고 들어간다. 사탕을 연주하면서 먹기엔 불편하기도 하지만 부드러운 초콜릿이 사르륵 녹아들면 기분도 좋아지고 눈도 번쩍 뜨인다. 이런 초콜릿은 누가 만들었을까? 카카오나무에서 초콜릿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를 한번 찾아보았다.

카카오 나무와 카카오 열매 (사진출처 flichr)

신이 먹는 음식

아메리카 대륙의 열대 지방이 고향인 카카오나무는 생장을 위해 비옥한 토양과 많은 비를 요구한다. 땅에 뿌리를 내린 지 4년 정도 지나면(수명은 80년 정도 된다.) 수령초를 닮은 괴상한 분홍색 꽃이 피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줄기에 열매가 달린다. 노랗게 혹은 빨갛게 익은 열매 안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을 둘러싸인 카카오 콩이 잔뜩 들어있다. 열매에서 꺼낸 종자는 바나나 잎 더미 아래에서 물기를 빼는 과정을 거친 다음 햇빛에서 건조된다. 카페인, 테오브로민 등의 알칼로이드를 함유한 카카오 콩이 모두 건조되면 이후에는 가공 작업이 이어진다.

카카오는 이국적이면서도 화려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나무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식물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일컬었다. 칼 린네도 재치를 발휘해 '신의 음식'이라는 뜻의 테오브로마를 카카오나무의 이름으로 정했다. 유럽인에게 정복되기 전, 그러니까 아직 설탕이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은 카카오 씨를 으깰 때 나오는 끈적끈적한 즙을 이용했다. 이것을 고추와 바닐라 같은 토착 식물과 섞어 만든 걸쭉한 액체는 축하 제례에서 사용하는 최상의 음식이었다. 신을 위해 축배를 들던 의식은 현재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어져 초콜라테 콘 추로스로 하루를 열고, 프랑스 사람들 역시 그릇 한가득 담긴 초콜릿과 쇼콜라를 즐기며 아침을 시작한다. 이들이 이렇게 초콜릿을 먹기 시작한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다. 400년 전만 해도 서양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음식은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라틴 아메리카에 당도했을 때 금과 은을 비롯해 콩, 감자 그리고 카카오 콩을 함께 발견했다. 처음에 그들은 지방질로 가즉한 이 쓰디쓴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전혀 몰랐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카카오 콩과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된 설탕을 섞어 먹어 본 모양이다. 설탕의 단맛과 짝을 이룬 카카오의 씁쓸한 맛은 놀라움을 자아냈고 그 결과 16세기 말에 이르러서 돈깨나 있는 사람 중에 설탕을 탄 초콜릿 음료를 마시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초콜릿의 탄생

카카오가 유입된 이후 생겨난 초창기 유럽의 초콜릿 판매점은 단순히 유행에 따라 움직이는 초콜릿 판매점에 불과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카스파루스 반 하우턴이 암스테르담의 초콜릿 공장에서 새로운 가공 방법을 고안하기 전까지 초콜릿은 계속 뜨겁고 걸쭉한 음료 형태로 소비되었다. 당시에 반 하우턴은 카카오 콩에서 지방분을 줄여 코코아 덩어리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하고 그것을 빻아 분말 형태로 만들었다. 그의 특허 보유 기간이 만료된 1838년에는 영국의 초콜릿 제조업자인 조지프 프라이가 이 시장에 참여했다. 반 하우턴의 아들 쿤라드는 판형 초콜릿의 가공법을 '네덜란드식'(코코아 분말이 물과 잘 섞이도록 알칼리염으로 가공 처리하는 방식)으로 개량해 맛이 부드럽고 색이 진한 초콜릿을 만들었다. 이 무렵(1894년) 대서양 건너 펜실베이니아 주의 데리 처치에서 밀턴 스네이블리 허쉬는 이전 사업의 실패를 딛고 재기해 새로운 초콜릿 공장을 세웠다. 이 사업은 성공을 거뒀고 1905년에 이르러 그의 회사는 세계 최대의 초콜릿 제조업체로 명성을 떨쳤다. 허쉬는 1907년에 바닥이 납작한 물방울 모양의 작은 초콜릿은 은박지에 포장해 판매하기 시작했고 그 이름도 유명한 허쉬 키세스는 허쉬 초콜릿 사에 더욱 큰 성공을 안겨 주었다. 이후 테리 처치라는 지역명은 허쉬로 재명명되었다.

지금도 인기가 있는 허쉬키세스 초콜릿 (사진출처 flichr)

과대광고가 진실이 된 초콜릿

1899년 반 하우턴 사는 그들이 제조한 네덜란드 초콜릿을 판매하기 위해 광고 대행사에 동화상 광고 제작을 의뢰했다. 가장 초창기에 제작된 동화상 광고의 하나인 이 영상은 피로에 찌든 회사원이 반 하우턴 초콜릿을 먹고 순식간에 기력을 되찾는 모습을 그려냈고 그와 함께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생명을 얻는 광고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아침을 깨우는 음려이자 건강식품으로 활용되고 관능적인 경험(19세기 사람들은 초콜릿에 최음 효과가 있다고 믿기도 했다.)을 안겨 주기도 한 초콜릿은 광고 문안 작성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은 제품이었다. 광고업자는 진실 대신 그들이 알리길 바라는 정보만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허쉬사의 밀크 초콜릿에는 "영양이 풍부한 당과"라는 별칭이 붙었고 프라이 사의 코코아 분말은 "복잡하고 값비싼 기계 장치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지구력과 활력을 제공하는 음식"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초콜릿은 머리를 좋게 해주는 식품으로도 선전되기도 했다.


한국의 발런타인데이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 초콜릿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 이 또한 발런타인데이의 유래와 관계없이 일본의 제과업체가 판촉 행사로 큰 성공을 이룬 마케팅 때문에 생겨난 문화라고 한다. 광고 홍보의 세계와 역사를 알면 또 흥미로운 사건, 사고가 많이 보일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오후를 활기차게 보내기 위해 진하고 달달한 카카오 함유 80% 이상 다크 초콜릿 한 조각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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