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의 대화법

종이의 역사, 닥나무와 파피루스

아타카_attacca 2022. 5. 3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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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나무에 관련된 책을 읽다 보니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종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종이와 인쇄의 발달에 우리나라가 빠지지 않는데, 서양과 동양의 종이 역사에 관련된 식물은 무엇이 있었을까? 동양에는 닥나무의 기원이 있고 서양에는 파피루스가 있다. 닥나무는 아시아가 원산지인 뽕나무과의 나무로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질긴 껍질을 '닥'이라 하는데 이를 얻는 나무라 하여 닥나무라 불린다. 이게 반해 파피루스는 지중해 연안 습지에 사는 여러해살이 풀로 펄프 속 가느라단 섬유 조각을 엮어 강하게 압착하는 방식으로 종이를 만들어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남기게 된다. 궁궐의 우리 나무(박상진), 식물, 역사를 뒤집다.(빌로스)의 책을 통해 닥나무와 파피루스에 대해 정리해보며 동서양 역사 속의 식물 이야기를 남겨보려 한다.

닥나무 껍질은 한지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사진 출처 두산백과)

우리의 인쇄문화 , 닥나무

닥나무는 넓은잎 작은키나무로서 전국에 걸쳐 자란다. 매년 잘라 새 움에서 나온 가지를 사용하므로 작은 관목으로 알고 있으나, 그대로 두면 줄기의 둘레가 대략 20cm까지도 자란다. 닥나무의 껍질에는 인피 섬유라는 질기고 튼튼한 실 모양의 세포가 들어있다. 이것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중국 후환의 체륜이 년 처음 종이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기원전 107년경 전한 시대에도 종이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 시대부터 종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나 중국 수입품이었는지, 우리 선조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본서기>에 "610년 고구려 담징이 일본에 제지 기술을 전수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는 이미 6~7세기에 종이 제조가 상당히 성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증적 자료로는 닥나무 종이가 쓰인 <신라 민정 문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경덕왕 때는 755년에 작성된 통인 신라시대의 토지 문서로, 1938년 일본에서 처음 발견되어 쇼소인에서 소장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종이의 쓰임새는 한층 넓어졌다. 관에서 종이를 만드는 공장을 두고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를 생산했다. 고려인들의 종이 만드는 기술은 매우 탁월해서 중국에서도 고급 종이로 여겨졌다. 고려 공양왕 3년(1391)에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해 닥나무 껍질로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인 저화를 만들어 썼다. 이것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쓰이지 않다가, 조신 태종 원년(1401)에 다시 발행되어 중종 때까지 제한적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제지 산업

조선시대에 와서 제지 산업은 더욱 번성했다. 세종 2년(1420)에는 서울 세검정 부근에 관영 종이 공장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여러 종류의 종이를 만들었는데, 이 일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산업이었다. 그래서 원료인 닥나무의 확보도 애를 써야 했다. <고려사>에도 기록이 있긴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려 40회에 걸져 닥나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백성들에게 닥나무를 재배하도록 권했으나 조선 태종 10년(1410) 승정원에 이런 상소문이 올라왔다. "대소 민가에 닥나무 밭이 있는 자는 백에 하나 둘도 없고 간혹 있는 자도 소재지의 관사에 빼앗기어 이익은 자기에 미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따릅니다. 그러니 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베어버리는 자도 있습니다" 또한 정조 17년 (1792)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 닥나무를 심는 것은 원래 중들이 하는 일이었으나 삼남지방의 사찰이 모두 황폐해져서 중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닥나무 밭도 따라서 묵어버렸습니다"라고 했다. 숭유억불정책(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한 정책)으로 핍박받던 조선시대 스님들의 일면도 볼 수 있다.

파피루스 종이는 풀로 된 펄프로 만든다. (사진출처 flickr)

파피루스, 짧지만 강렬했던 종이 역사의 시작

파피루스는 기원전 3000년경에 나일 강 삼각주의 진흙투성이 기슭에서 최초로 발견된 이후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비록 1000년 전에 그 용도를 상실하고 말았지만 이집트인들은 약 4000년 전부터 역사에 따른 인류 변천사를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파피루스는 동물의 가죽을 벗겨 건조한 후 납작하게 눌러 만든 양피지가 등장하면서 종이 세계의 왕좌에서 물러나게 됐지만, 여전히 경량성과 유연성 면에서 귀한 재료로 여겨진다. 종이의 가공법을 고안한 인물로 알려진 중국의 채륜은 물을 먹인 종이죽에 대나무로 만든 가는 체를 담그고 그것을 꺼내어 납작하게 눌러 건조했는데 그가 기원후 105년에 개발한 이 제지법은 751년 아랍 세계로 전해졌다. 아랍인들은 이 가공법을 개량해 종이의 원료로 넝마를 사용했다. 11세기에 스페인을 정복한 후 그곳에서 종이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아랍 세력이 다시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물러나게 된 바로 그해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고 나무껍질로 종이를 만들어오던 아스텍과 톨텍 사람들을 만났다. 파피루스 종이와 마찬가지로 물기를 머금은 종이 펄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셀룰로오스이다. 식물 세포벽에 존재하는 셀룰로오 스는 식물에 강도와 유연성을 동시에 부여하는 견고한 물질인데 어쩌면 채륜은 말벌 무리가 식물의 셀룰로오스를 씹어 등롱처럼 생긴 종이 벌집을 만드는 모습을 관찰하던 중에 발명의 단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1719년 프랑스의 과학자 르네 드 레오뮈르는 연구를 통해 인부들이 말벌처럼 나무를 곱게 갈 방법만 찾는다면 넝마 대신 목재를 종이 제조에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1843년 마침내 독일의 켈러가 쇄목펄프의 제조법을 고안해 냈고 그로부터 12년 후 멜리어 와트가 화학 펄프를 특허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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