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의 대화법

네덜란드의 꽃, 튤립(1)

아타카_attacca 2022. 6. 1.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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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 우리나라의 식물들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찾기 시작하면서 2~3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간다. 처음에 서양음악사에 대해 포스팅을 시작한 것도 역사를 달달 꿰뚫고 있는 재주는 못하지만 역사나 관련 예술사들을 엿보는 것을 즐겁게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서양 음악사는 종교의 발전으로 시작하여 악기의 발전, 그리고 지배층과 사회운동에 따라 예술적 기호가 변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흐름에는 미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음악가와 미술가는 돈 많은 귀족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과 그림을 그려야 했고 시대 흐름에 반영된 고객의 니즈는 문화 예술을 발전시켰고 지배층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양식을 발전시키며 변화되어왔다. 식물에 관한 이야기도 꾸준히 찾게 되다 보니 역사와 시대에 따라 한 획을 긋는 식물들이 참 많구나 하고 느낀다. 그중 튤립은 여러 곳에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눠서 써보려 한다.
지금 읽고 있는 <식물, 역사를 뒤집다>와는 또 다른 시각과 깊은 역사적 통찰력으로 쉽게 글로 풀어주신 고정희 작가님의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에서 튤립 버블 이야기가 쉽고 상세하게 나와있어서 두 책의 내용을 찾아보며 적어보았다.

터키에서 시작된 튤립 사랑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진출처 flickr)

터번이라 불린 꽃

오늘날 튤립은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꽃으로 통하지만 이 꽃은 사실 헝가리와 터키, 그리고 '튤립의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의 국화이기도 하다. 16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황제가 뷔 스베르라는 사람에게 터기를 좀 둘러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이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보니 도처에 여태껏 보지 못했던 꽃이 만발하였더란다. 더 신기했던 것은 사람들이 그 꽃을 한 송이씩 머리에 꽂고 다니는 거였다. 특히 남자들이 머리에 천을 두르고 그 주름 사이에 한 송이씩 꽂고 다니는 모습이 진기했다. 그래서 옆에 있던 가이드가 저걸 뭐하고 하느냐고 순으로 가리키며 물었더니 가이드가 "아 저거요, 저건 튀르판이라고 하는 거예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터키에서는 터번을 튀르판이라고 한다. 외교관이 나중에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터키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장미같이 생긴 빨간 꽃을 머리에 꽂고 다니는데 그 꽃을 튀르판이라고 한다." 이렇게 터키에서 온 신비한 꽃의 학명은 터번을 닮았다 하여 같은 어원으로 튤립이 되었고 이는 오랜 세월을 거쳐 네덜란드의 상징이 되었다. (튤립은 원래 터키에서는 랄레라고 불린다고 한다.) 튤립 재배 기술을 가장 먼저 개발한 것이 터키였고. 1630년 경엔 이스탄불에 대략 삼백 명의 플로리스트와 약 팔십 개의 꽃집이 있었다고 한다.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터키의 튤립 사랑은 여전히 남다르다.

네덜란드의 꽃이 되다.

네덜란드에 튤립이 들어온 후 1630년경부터 서서히 시작된 튤립 열풍이 1634년 고조되었다가 1637년 투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때의 상황을 보면 마치 한국의 부동산 시장과 흡사한 양상으로 발전해 갔었던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를 주거의 목적이 아니라 투기 목적으로 분양받고 그것을 되팔고 되팔아서 엄청난 잉여가치를 형성한 것과 흡사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는 튤립이 그만큼 투자 가치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튤립의 독특한 성격과 17세기 네덜란드와의 절묘한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네덜란드의 상황과 튤립이라는 식물의 별남 점을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

17세기의 유럽은 대단히 어수선한 시기였고 그중 네덜란드는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전쟁에서 패하고 물러나자 구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공화국 체제를 선포했다. 종교에 관대했던 네덜란드에는 유럽 전역에서 신교도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이는 곧 문화와 예술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이 된다. 유럽은 전쟁으로 피폐된 대륙 재건을 위해 많은 물자가 필요했고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국제 교역이 꽃피기 시작했다. 특히 인도와의 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기면 투자를 하거나 취미생활에 눈을 돌리게 된다. 투자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그때도 부동산이었고 그다음이 미술 그리고 튤립이었다.

튤립의 별난 특성이 버블을 일으키다.

튤립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식물에게선 보기 힘든 별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번식 속도가 엄청 느리다. 그리고 이 완벽한 꽃이 가끔씩 이변을 부렸다. 분명 빨간 튤립의 구근을 심었는데 이듬해 엉뚱한 꽃이 피는 거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거다. 이 돌연변이의 결과로 아주 특별한 꽃이 하나씩 나타나곤 했다. 이는 일부러 육종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튤립 마음대로 였다. 나중에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진딧물이 매개가 되어 퍼뜨리는 바이러스가 이 변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자연의 조화였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성격 때문에 튤립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값이 오르면서 많은 농부들이 튤립 재배로 업종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튤립은 매매 계약을 하고 나서 또 여러 달을 기다려야 상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구근으로 번식하는 식물들은 꽃이 지고 나면 그때부터 새 구근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늦여름이나 초가을이 되어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우선 튤립을 구매하고 싶은 사람은 봄에 꽃이 필 때 재배원에 가서 실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가계약을 했다. 그리고 가을에 완성된 구근을 받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파트 짓기도 전에 분양받아 놓고 기다리는 것과 같은 시스템이었다.(오늘날의 주식선물거래와도 유사하다.)

이레네 공주라 불리는 주홍빛 튤립 (사진출처 flichr)

튤립이 어느 정도 인기상품이 되면서 원예가들이 화가를 시켜 튤립을 하나하나 그리게 했다. 그리고 복잡한 학명 대신 쉬운 이름들을 붙였다. 초기에는 유명한 공주 이름이나 장군 이름들을 따서 붙였다. 기억하기 좋은 까닭도 있었지만 튤립의 수많은 변종 때문에 식물학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카탈로그가 탄생했다. 이제 재배원에 직접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여기 중개인들이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5퍼센트 정도의 계약금을 걸어 놓고 봄에 대략을 예약을 해 놓은 뒤 구근이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동안 그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되파는 거였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팔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하는 과정에서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된다. 그러기를 몇 년 하다 보니 이제는 아예 판매자와 구매자가 주막에 모여 칠판에 가격을 써가며 빠른 속도로 사고파는 주식시장으로 변모해 가게 되었다. 그사이 중개인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튤립 재배원도 빠른 속도로 증가했고 공급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러다가 공급과 수요 사이의 저울이 공급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면서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분노와 충격의 튤립 세상이 정리된 후 튤립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튤립을 재배하고 사랑하는데 전념하자는 의미로 가장 아름다운 튤립을 선발하는 경진대회를 열었고 이후 오늘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튤립 축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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