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의 대화법

[식물의역사] 어디서든 잘 자라는 양배추

아타카_attacca 2022. 5. 22.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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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식탁에서 가장 많이 올라오는 야채는 양배추이다. 사시사철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양배추는 다이어트와 건강에도 좋고 다양한 방법의 요리에서 잘 어울리고 맛도 좋다. 식사 준비 시간이 부족하여 급하게 쪄서 따뜻한 밥 위에 된장만 올려 싸 먹어도 달큼한 풍미가 어우러지며 입맛을 돋운다. 이런 양배추는 언제부터 인간의 식탁에 올라오게 되었을까? 빌로스의 <식물, 역사를 뒤집다.>에서 양배추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양배추는 영국과 미국의 식료품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디서든 잘 자라는 양배추

 2,500년 전 켈트족 농부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양배추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미국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미셀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거쳐 수많은 채소 재배가를 탄생시켰다. 또 양배추는 세계 식품 보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을 일으킨 촉매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양배추가 이렇게 유명해진 것일까? 그것은 보잘것없는 한 줌의 검은 씨앗에서 거대한 식용 작물이 자라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2000년에 바브 에버링엄은 알래스카 와실라에서 48kg짜리 양배추를 길러 냈는데 이는 미국 최고 기록이었다. 괴물 같은 이 양배추는 거의 양 한 마리의 크기와 같았으며, 1989년에 사우스 위일스 홀랜 해리에서 버나드 레이버리가 키운 56,24kg짜리 양배추(세계기록)와도 맞먹었다. 양배추는 대다수 온대 기후 지방과 토양에서 생육하기에 적합하고, 최소한의 관리만으로도 재배할 수 있어 전 세계의 정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물이 되었다.

승리를 위해 밭을 가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조지 5세가 버킹엄 궁전의 화단을 뒤집어엎고 양배추와 감자를 심은 이유는 채소의 크기보다 수확량에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 정부가 추진하던 "온 국민 텃밭 가꾸기"의 일환이었다. 그 결과 정부에서 시민에게 임대한 채소밭의 수는 60만에서 150만으로 크게 늘어났고, 노동을 금하던 영국 국교회에서도 신도들이 일요일에 양배추 받을 가꾸는 일만큼은 특별히 허가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무렵 영국은 놀랍게도 200만 톤이나 되는 채소를 길러 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르러서 미국 농무부는 '채소를 기르기 위해 공원과 잔디밭을 갈아엎는 행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때는 미국 내의 식량 공급 과잉 현상이 사상 최고치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고, 질소 비료를 양배추의 생장 촉진에 쓰기보다 폭발물에 이용하는 편이 더 이드인 시대였다. 하지만 1942년에 버티사에서 종자 묶음 판매를 시작하자 종자 거래량이 3배로 늘었고 약 4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이 '직접 채소를 가꾸어 먹자'는 대대적인 움직임에 동참했다. 영국에서는 전쟁 당시 정부 차원에서 양배추 재배를 장려했는데, 영국 농무부 장관은 '모든 이가 텃밭 가꾸기 운동을 하자'라고 선언했으며, 독일의 U보트가 식량을 싣고 영국으로 가는 상선을 표적으로 삼자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공무원 시몬스는 그의 저서 <채소 재배자를 위한 안내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정부가 가정에서 채소를 더 많이 기를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시 식료품 보급 운동에 힘을 실어준 체이즈의 연결형 이랑 덮개는 재배지를 확장하지 않아도 채소 수확량을 두 배로 느려주고 재배 기간을 몇 주씩이나 단축했으며 1년 내내 신선한 채소를 제공해 주었다. 이렇듯 양배추는 영국인이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일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신선한 채소를 구하는 새롭고 편리한 방법을 만나게 되었다.

돌파구-냉동 채소의 유통망 확대

 1900년대 초, 얼음으로 뒤덮인 캐나다 북부 래브라도 반도의 황무지에서 한 모피 사냥꾼이 통에 든 언 소금물을 깨고 그 속에서 양배추를 꺼낸다. 밥으로 불리던 이 사내는 온통 얼음으로 둘러싸인 땅에서 신선한 채소를 간절히 바라던 아내를 위해 얼어붙은 먹거리로 괴상한 실험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 별난 발상을 통해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북극은 기온이 영하 50도에 달해 생선이나 고기를 바깥에 내놓기만 해도 바로 얼어붙는데, 신기하게도 맛은 그대로였다. 이러한 사실로 밥은 소금물에 담가놓은 양배추로 실험을 했다. 그는 후에 "에스키모는 수백 년간 이 방법을 이용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저 많은 이가 이용할 수 있도록 냉동식품을 포장해서 내놓았을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17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래브라도 반도의 겨울을 재현하려고 애썼으나 결국 파산했다. 이후 매사추세츠 주의 글로스터로 이사한 밥은 그곳에서도 급속 냉동 법을 계속해서 실험하였고 채소를 뽑아 바로 얼리기 위해 이동식 냉각기를 만들어 그것을 트럭에 싣고 들판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식품 가공 회사 사장의 딸 마저리 메리웨더 포스트가 밥의 냉동 거위 고기를 맛보았고, 3년 후 그녀는 거위 고기는 물론 밥의 회사까지 함께 매입했다.


 어디서나 잘 자라고 영영가가 높은 양배추는 전쟁 속 식량난 극복과 자국의 국민 건강을 위해 빠른 발전을 했고, 이후 각 가정의 식탁에 매일 오르면서 다양한 요리로 변화하고 우리가 아는 익숙한 조리법마다 빠지지 않는 식재료가 되었다. 인간에게 생존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고 지난 역사의 위기와 기회 속에서 식물은 의식주, 문화, 예술 그리고 경제까지 역사 속의 발자취가 되어 남아있다. 식물을 통해 뒤바뀐 역사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고 자연을 바라보는 시야까지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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