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바로크 양식의 음악 양식(1)

아타카_attacca 2022. 4. 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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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

바로크라는 용어는 오늘날 음악사에 있어서 160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의 시대와 그 음악 양식을 의미한다. 바로크라는 용어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그 용어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를 가진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처음 미술에 적용되었을 때는 그 시대와 양식을 르네상스 후에 예술적 퇴폐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에서였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점차적으로 예술비평가들은 <바로크>를 괴상하고, 과장되고, 불규칙함을 함축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서 벗어나 한 시대의 정당한 표현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음악사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고, 그 대신 이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들에는 계속 저음의 시대, 콘체르타토 양식의 시대 또는 봉건 절대주의 시대 등이었다. 

17세기의 유럽

17세기에는 끊임없는 전쟁의 시대였다. 17세기 전체를 통해 유럽 어느 한 구석에도 전쟁이 없던 시기는 7년 정도였을 뿐이었다. 많은 심각한 종교적 분쟁이 정치적 요인에 의해 일어났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유럽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지적인 면에서 흔적을 남겼다. 어떤 면으로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 사이에 있었던 오랜 갈등의 정정이라 볼 수 있다. 1700년 전후의 유럽에는 서로가 뚜렷한 국경이 없는 구가들이 무수리 난립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지역 내에는 300개가 넘는 나라가 있었고, 이탈리아에는 12개 이상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들의 지배계급은 상당한 부와 권력을 누렸고 예술을 보로 장려하여 독립 유지와 국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바로크 시대에 교회나 세속 궁정이 음악의 강력한 후원체였다. 그리고 점차로 형성된 중산층은 또 하나의 중요한 후원 계급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절대 군주국의 성장이다. 각 나라의 군주들은 종교적 권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귀족들이나 자유 도시의 전통적인 <자유>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작은 나라 군주들이 본보기로 삼았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가장 성공적인 절대국가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국민생확을 전례 없이 통제하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정대주의 국가들의 표본이 되었고, 그 왕 루이 14세는 당시에 군주권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프랑스어는 문화와 외교의 언어가 되었고 베르사유 왕궁은 유럽의 문학과 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이 세기는 또한 많은 새로운 발견과 발전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신세계의 식민지화로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과학적 탐구가 절정에 이르었다. 케플러와 갈릴레오는 천문학에서 크게 공헌하였고 리벤 호크는 맨눈으로 대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세계를 현미경으로 탐험하였으며 뉴튼은 중력의 법칙을 공식화하였다. 예술도 역시 학문과 지식의 이러한 탐구를 반영하였다. 그 시대는 그 성향이 상반되는 양식을 보이는 엘 그레코나 렘브란트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원숙한 화가를 배출하였다. 건축가들은 르네상스의 조화스럽고 직선적인 선에서 벗어나 육중하면서도 다면적 세부를 갖는 곡선적 모양을 구사하였다. 바로크 양식은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묘사이긴 하지만> 미술이건 건축이건 음악이건 주어진 공간을 활동과 움직임으로 가득 채운다. 미술에서는 색, 세부사항, 장식 등의 가능성을 확대시켰고, 음악에서는 르네상스의 리듬과 화성이 무시되고 새로운 양식이 창조되었다. 

바로크 음악 양식의 특징들

바로크의 새로운 음악 양식은 전 지역에서 같은 방식으로 동시에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음악에 있어서 양식의 변화는 1560년경에 베네치아에서 일어났는데 1580년에는 변화된 양식이 이미 전 이탈리아에 퍼지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이탈리아는 음악의 창조적 중심시였고 프랑스와 독일도 곧 중요한 공헌을 하여 차츰 음악적으로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 궁정의 양식이 지배하는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나라의 음악은 중산층이 강했던 영국 같은 나라의 음악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음악은 이전의 르네상스 음악이나 이후 고전음악과는 구별되는 어떤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가졌다. 바로크 양식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이 시대의 음악 양식도 후기에 가면 초기에 보인 변화적 요소들이 정착 확립되면서 초기와의 양식적 차이를 보여준다는 사실도 또한 기억해야 한다. 

화정과 단조

르네상스 화정은 교회 선법 안에서 이루어진 성부 진행과 관계된 음정들에 근거하였다. 어떤 음정들은 협화음을 낸다고 인식되었고 어떤 음정들은 불협화음으로 간주되었다. 르네상스의 화성은 이 협화음과 불협화 음정들을 사용하면서 결과된 부차적인 것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바로크 시대에는 화성의 장단조 체계의 궁극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관념은 하나의 중요한 기본음인 으뜸음, 그리고 그것과 다른 음과의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그 한 결과가 <화성 진행> 즉 한 화정에서 다른 화성으로 진행한다는 사고이다. 딸림화음은 으뜸화음으로 가려는 상한 성향을 갖는다. 다른 화음은 그 나름대로의 다른 효과를 갖는다. 장단조 화성은 선법적인 화성보다도 음악에 강력한 내적 역동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강한 조적 중심이라는 보장 아래 바로크 작곡가들은 불협화음의 사용에 있어서도 좀 더 모험적일 수 있었다. 선법적 화성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성부 진행을 용의주도하게 하였던 르네상스 작곡가에 비해 초기 바로크 작곡가들은 많은 화성적 실험을 하였다. 새로운 장단조 화성의 사용은 한 곡의 조성적 중심을 변화시키는 <전조의 과정>을 통해 풍부해졌다. 일단 한 음이 조의 중심으로 확립된 후 그 중심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흥미를 일으켰다. 전조가 화성적 다양성을 위한 중요한 자원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바로크 시대의 기본적인 작곡기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전조의 사용과 함께 <평균율>이 소개되었다. 교회 선법의 시반을 형성한 고대 그리스 선법들은 피타고라스에 의해 발견된 음정들에 근거하였다. 그 선법에서는 모은 반음 음정이 균등한 크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불균등성이 조가 변화될 때에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문제는 모든 반음이 미리 정해진 크기를 갖는 건반악기의 경우 특히 심각했다. 그래서 모든 악기들이 여러 조에서 다 연주할 수 있도록 음들을 균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곳곳에서 열띤 반대에 부딪쳤으나 이 균등 조율 또는 평균율의 음계가 상당히 유용했기 때문에 결국에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바흐의 "평균율 곡집", 즉 모든 조로 작곡된 일련의 건반악기 곡들은 새로운 조율의 장점을 보여주기 위해 작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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